벨기에 맥주는 여름의 과일 같다
벨기에 맥주는 여름의 과일 같다
― 시원하게 한 병, 그 안에 담긴 여름 이야기
여름엔 입맛도 까다로워진다. 무거운 음식은 물리고, 음료도 너무 달면 질리고, 맹숭맹숭하면 또 심심하다. 그럴 때 딱 좋은 게 있다. 바로 벨기에 맥주다.
사실 벨기에 맥주는 종류도 많고 향도 복잡해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근데 여름이라는 계절에선 얘기가 좀 달라진다. 향이 복잡해도 부담 없이 넘길 수 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과일 향이나 허브 향이 뭔가 여름과 참 잘 어울린다.
마치 잘 익은 과일 한 조각처럼.
1. 호가든, 시원한 오렌지 물 한 잔 같은

여름 맥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아마 호가든(Hoegaarden)일 거다.
밀맥 스타일의 대표주자인데, 부드럽고 약간 탁한 색에 오렌지 껍질과 고수 씨앗이 들어가 있다.
들으면 ‘고수 씨앗?’ 하고 고개 갸우뚱할 수도 있지만, 막상 마셔보면 은은한 향이 입안에서 톡 하고 퍼진다.
진짜 포인트는 그 산뜻함.
쨍한 오후에 땀 좀 흘린 뒤, 차갑게 식힌 호가든 한 잔 마시면 에어컨 없이도 기분이 식는다.
정말로 오렌지 한 조각을 물에 띄운 느낌이랄까.
2. 세종 뒤퐁, 여름 들판을 걸어다니는 맛

좀 더 매력적인 여름 맥주를 찾는다면, 세종(Saison) 스타일을 추천한다.
그중에서도 클래식한 건 단연 Saison Dupont (세종 뒤퐁).
이건 원래 벨기에 농장에서 여름철 일하던 농부들을 위해 만들었던 맥주다. 그러니까 진짜 여름 전용.
향을 맡으면 허브 같은 느낌이 먼저 올라오고, 뒤에는 약간 시트러스한 산미, 살짝 후추 같은 매운 향도 돈다. 마시면 시원하면서도 약간 드라이해서, 입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
‘맛이 많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맥주다. 근데 그 ‘많음’이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고, 시골길 걷다가 갑자기 꽃향기 스치는 그런 기분.
여름 캠핑이나 바비큐 자리에서 이 맥주 한 병 있으면 분위기가 레벨업된다.
3. 크릭(Kriek), 체리를 그대로 담은 한 병
이제 진짜 ‘여름 과일 같다’는 말이 제대로 실감 나는 맥주.
바로 Kriek (크릭)이다.
이건 람빅(Lambic)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든 맥주인데, 자연 발효로 만들고, 거기다 체리를 넣어서 숙성시킨다.
대표적인 크릭 맥주는 두 가지다:
1) Boon Kriek (분 크릭)

진짜 체리를 넣어서 만든 정통 스타일. 달달하지만 너무 끈적이지 않고, 은은한 산미와 깔끔한 탄산감이 아주 좋다. 잔에 따르면 루비빛 컬러가 정말 예쁘다.
디저트처럼 마셔도 좋고, 입가심으로도 괜찮다.
2) Lindemans Kriek (린데만스 크릭)

이건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한 편. 체리 소다 같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친숙하고 마시기 쉬워서, 평소 맥주를 잘 안 마시는 사람도 좋아할 확률 높다. 여름에 얼음 한 두 조각 넣어서 가볍게 마시면 진짜 시원하다.
둘 다 탄산감이 샴페인처럼 살아 있어서 축제 분위기에도 잘 어울린다. 뭔가 마시는 순간 기분이 달라진다.
4. 프랑부아즈(Framboise), 라즈베리 향이 톡톡
크릭이 체리라면, 프랑부아즈(Framboise)는 라즈베리를 넣어 만든 람빅이다.
향부터가 완전 베리 베리. 새콤달콤한 과일 향이 강하게 올라오는데,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대표주자는 역시:
1) Lindemans Framboise (린데만스 프랑부아즈)

린데만스는 입문용으로 특히 좋다. 너무 시지 않고, 부담 없는 단맛이 있어서 진짜 과일 와인 같은 느낌.
파르페나 크레페 같은 디저트랑 같이 먹으면 완전 궁합 좋고, 그냥 단독으로 마셔도 ‘여름날 디저트 타임’이 된다.
프랑부아즈는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는 ‘뭔가 기분 좋은 향기를 마신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밤보다는 낮, 야외보다는 카페 테라스 같은 공간이 더 잘 어울린다.
5. 여름 안주도 과일처럼 가볍게
이런 맥주들과 함께라면 음식도 무겁지 않아야 잘 어울린다.
1) 호가든에는 가벼운 샐러드나 레몬 드레싱 해산물
2) 세종 뒤퐁에는 훈제 햄, 프로슈토, 그릴 치킨
3) 크릭이나 프랑부아즈에는 치즈 케이크, 브리 치즈, 베리 디저트
딱히 거창하지 않아도, 가볍고 향 있는 음식이면 충분하다. 그 자체로도 맥주가 이미 꽉 찬 맛을 갖고 있으니까.
결국, 여름에 벨기에 맥주를 마신다는 건
그냥 맥주 마시는 게 아니다.
그건 여름을 마시는 거고, 입 안에 향이 피는 거고, 한 모금에 기분이 환기되는 순간을 갖는 거다.
벨기에 맥주는 여름의 과일 같다.
호가든은 오렌지 같고, 세종은 들판의 풀향기 같고, 크릭은 체리, 프랑부아즈는 라즈베리.
향으로 마시고, 기분으로 넘긴다.
그리고 어느새, 맥주 한 병이 계절의 기억이 되어 남는다.